[칠레] 6일차 O 트래킹의 시작, 센트로에서 세론까지 13km 걷기

1. 일정
- 오전 6시 반-9시)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국립공원 내 아마르가까지 이동
- 오전 9시-10시) 아마르가에서 센트럴 웰컴 센터로 이동
- 오전 10시 반-오후 2시 반) 세론 도착
2. 사진과 감상
오전 5시 알람에 깨기는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하다가 5시 50분이 되어 꾸역꾸역 일어났다. 나는 어제 1시에 자서 그나마 4시간 정도라도 잤다지만, 친구와 J는 3시에 자서 2시간을 겨우 잤을까 한 상황이라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일어나서 대충 세수하고, 어제 준비해 둔 옷을 입는 사이 픽업 차량이 온 J가 먼저 떠났다. 우리는 O 트래킹에 챙겨가지 않는 짐들을 리셉션에 맡기고 싶었는데, 리셉션 오픈 시간은 한참 뒤라 면대면으로 맡기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우리 방에 짐을 깔끔히 옮겨둔 다음 구구절절 메시지를 보내 놓고 나옴. 괜찮은 숙소니 알아서 잘해주지 않을까.


푸에르토 나탈레스 버스 터미널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버스를 탔다. E가 토레스 델 파이네로 가는 버스를 탈 땐 왼쪽 자리를 차지해야 삼봉을 잘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다행히 우리 좌석은 왼쪽이었다. 저번에도 온 지 한 시간 만에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어제는 늦게 도착하자마자 시내로 들아와서 나탈레스 항구의 풍경을 제대로 못 봤는데 항구 도시가 참 아기자기해서 이쁘더라. 하얀 설산을 배경으로 푸른 바다와 작은 마을이 점점이 찍혀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토레스 델 파이네행 버스는 꼭 버스 수르(Bus Sur)를 타자. 아니라면 적어도 투리스모 자하는 타지 말자. 우리 버스는 마을 외곽까지 한 시간 정도는 잘 달리더니, 경계도로에서 갑자기 차를 멈추고 15분 동안 화장실 갈 시간을 주었다. 차라리 이런 시간 없이 빨리 가는 게 좋은데... 15분 동안 버스 수르 차를 너 다섯 대 정도 보내고 나서야 다시 출발하더라. 그동안 버스 내부는 난방도 안 돼서 다들 얼어 죽는 줄 알았다.

어제 잠을 많이는 못 자서 버스 이동 시간 동안 자고 싶었는데, 삼봉이 잘 보인다고 해서 저 멀리 날아가는 정신줄을 붙잡으며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앞에 정말 삼봉이 나타났다! 오늘은 날씨도 좋아 삼봉의 뒷면이 아주 깔끔하게 드러났다. 나는 삼봉보다 피츠로이가 더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삼봉의 묵직한 웅장함은 피츠로이의 날카로움과는 또 다른 느낌이어서 생각보다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삼봉을 오를 마지막 날의 날씨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오늘 버스로 지나가면서라도 깔끔한 모습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버스는 중간에 잠시 멈춰 국립공원 직원 두 명을 태웠다. 처음에는 뭐를 검사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토레스 델 파이네 입장 티켓을 달라고 하더라. 우리는 입장권을 미리 사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내려 돈을 내러 갔다. O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은 인당 49달러라는 무시무시한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다행히 칠레 화폐로 하니까 인당 36,400페소로 살짝 저렴해졌다.



버스는 한참 동안 삼봉을 옆에 두고 달리다가 아마르가에서 멈춘다. 센트럴까지 가는 사람들은 이때 버스에서 내려 센트럴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다행히 일사불란하게 줄을 세우고 티켓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어 한 30분쯤 기다려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 티켓은 인당 3,000페소. 기다리며 뒤쪽으로 삼봉 엉덩이가 보이길래 또 열심히 찍었다. 시작부터 삼봉은 질리도록 보는 것 같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더 달려 트래킹의 시작 지점인 센트럴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깔끔한 화장실 한 번 갔다 오고, 스틱을 내 허리 언저리쯤으로 조절한 뒤에 트래킹 시작 지점까지 갔다. 이 선을 넘으면 진짜로 O 트래킹 시작이고, 힘들다고 마구잡이로 돌아올 수도 없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주변 풍경이 화창하고 파릇파릇해 걸을 기분이 났다.



초반에 방향을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 한 외국인 커플이 길을 알려줬다. 오늘의 목표는 센트로에서 세론 캠핑장까지 가는 것. 이동 거리는 대략 13km 정도고 4-5시간 정도가 걸린다. E와 B의 조언에 따르면 6시간 정도를 잡고 가라 했으므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오르막길을 오르고, 언덕을 몇 개 오르락내리락하고, 좁디좁은 잔디길을 따라 걷다 보니 숨이 금방 찼다. 그래도 버스에서 느꼈던 살인적인 추위는 금방 가셨다. 걷다 보니 땀도 나고, 기온 자체도 온화했던 것. 그리고 언덕 몇 개를 지나니 완만한 평지가 계속되어 걷기도 수월했다. 역시나 다들 쉽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벌써부터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언덕 한두 개 정도 올라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저 멀리 설산과 푸른 들판과 비현실적인 색감의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리의 뒤를 이어 열심히 걸어오는 사람들을 보곤 또 힘을 내서 걷는다.


물론 이런 가파른 오르막이 나올 때면 여유를 잊고 폴대에 온몸을 기대며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아직은 트래킹 초반에 어제 먹은 든든한 저녁 에너지가 남아 있어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내일은... 딱히 생각하지 않고 걷기로 함.


트래킹 길은 숲길과 초원이 번갈아 나왔다. 초원을 걷는 동안 뻥 뚫린 풍경을 감상하며 햇빛에 녹다가, 어느 순간 숲길에 들어서면 나무 그늘 속에 숨어 시원함을 만끽하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걸음이 빨라서 가끔 트래킹 무리의 선두가 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길을 찾느라 참 힘들었다. 그래도 길을 잃을 만하면 노란색 표지판이 눈에 띄니까 미아가 될 걱정은 할 필요 없을 듯하다.



중간에 작은 냇가가 나와서 부족한 물도 보충했다. B가 추천한 돌맛을 마시는 순간! 아직 최상급인 이끼 맛 물은 마셔보지 못했지만, 계곡물도 시원하니 깔끔해서 좋았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물을 따로 안 챙겨가도 되어 편하다. 물까지 챙겨가야 했다면 어깨와 허리가 남아나지 않을 듯.



걷다 보니 저 멀리 하늘색 물줄기가 보인다. 세론 캠핑장이 정확히 어느 정도에 위치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오늘은 저 물줄기가 있는 평원까지 내려가면 트래킹 일정이 끝날 것 같다. 지나가는 길에 죽은 나무들이 무수히 많이 보이던데, 이스라엘 관광객들이 낸 불 때문에 탄 곳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안타까웠다. 사방이 파릇파릇한데 일부분만 허옇게 말라비틀어져 있어서 섬뜩하기도 하고.

트래킹 길을 걷다 보면 가끔 말이 지나는 길과 사람이 지나는 길을 구분해놓은 표지판이 있던데, 그럴 때마다 말이 지나가는 길은 트래킹 길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진다. 말은 걸음이 빨라서 사람이 하루 종일 걷는 길을 몇 시간 만에 주파하리라 생각하니 부럽다.


오르막을 올랐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완만한 오르막이라 내려가는 길도 평이한 내리막이었다. 평이하지 않은 내리막은 O 트래킹 3일 차에 제대로 맛보게 되는데... 어쨌든 풀숲을 헤치고 걸어 열심히 언덕을 내려갔다.



언덕을 끝없이 내려가니 드디어 평원에 도착했다. 내리막을 걸을 때부터 중간에 쉴 만한 곳이 있으면 간단히 점심을 먹고 가자 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쉬지도 못하고 걸었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누텔라 바른 빵 두 조각과 가루 주스. 아마 매일의 점심 메뉴가 될 것이다. 누텔라가 한 통밖에 없어 많이 바르지 못하니 그렇게 달지도 않더라. 하지만 2시간을 내내 걷다가 먹는 빵은 꿀맛이다.



이후로는 계속해서 평원을 걸었다. 이 정도쯤 오니 이제 선두에 선 멤버도 비슷비슷해서 서로 지나치게 되면 살갑게 인사도 한다. 연둣빛 들판에 하얗게 핀 야생화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중간에 사진도 많이 찍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세론까지 3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발견!



저 먼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였던 하늘색 물줄기도 어느덧 바로 옆에서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따끈따끈한 말똥과 진흙 위에 찍힌 선명한 말발굽이 늘어났다 싶더니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말 세 마리도 만남. 아마 물자를 전부 조달하고 돌아가는 길인 듯. 그리고 2km 표지판을 지나, 드디어 마지막 관문인 1km 표지판을 발견했다. 이때부터는 오히려 엄청 지쳤다. 고지까지가 1km 남았다고 생각하니 하루빨리 도착해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진 것. 마지막 1km를 걷는 동안에는 1km가 이렇게 길었나를 입에 달고 걸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앞에서 걷던 사람들이 들어간 수풀 속으로 따라 들어가니 노란색 텐트가 늘어져 있는 세론 캠핑장이 나타났다. 전체적으로 그렇게 힘든 편은 아닌 트래킹이었음에도 살 것 같았다. 확인해 보니 점심 먹은 시간 포함해서 4시간 만에 도착한 거라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이런 트래킹에서도 사람들 이기는 걸 좋아하는 나는 행복.

리셉션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가방을 놓고 신발을 벗은 다음에 들어가야 하더라. 신기했다. 친절한 직원은 우리의 이름만 확인하더니 캠핑장 규칙을 간단히 설명해주고 바로 우리 텐트로 안내해주었다. 보통 여권과 PDI를 확인하지 않나 싶었지만 아무것도 요구 안 하니 편하게 체크인 완료.


그리고 우리 텐트는 우리가 칠 필요가 없었다! 캠프 사이트에 이미 말끔히 쳐져 있었고 안에 우리가 옵션으로 넣은 매트도 단정히 놓여 있었다. 걸어오면서 텐트 치는 걸 걱정했던 우리인데 단박에 걱정 하나가 사라졌다. 텐트 자체도 구멍 난 곳 없이 말끔하다.
내친김에 화장실도 바로 확인해 봤는데 화장실 외에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실이 있었다. 샤워실 문 앞에는 각자 5분씩만 이용하라고 쓰여 있으나 일단 핫 샤워가 된다는 게 충격. 다행히 우리는 일찍 도착한 편이라 기다리는 줄 없이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따뜻한 물은 꽤 일찍 떨어진다고 하니 운이 좋았다.


샤워도 간단히 하고, 첫 트래킹 일정을 무사히 완주했다는 게 뿌듯했던 우리는 산장에서 맥주를 한 병씩 먹었다. 세론 산장의 파타고니아 맥주는 한 병에 무려 7,000페소. 한화로 만 원이 넘지만 칠레의 파타고니아 맥주는 진짜 맛있고 트래킹 이후에 먹는 건 더 꿀맛이다. 아타카마에서 샀던 컵라면도 하나씩 뜯어먹으니 행복했다.


맥주와 컵라면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리셉션 건물 안에 앉아 있는데, 건물 안 트래킹 지도를 보다가 우리의 남은 캠핑장 일정이 꽤 길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져온 쌀은 1kg밖에 안 되고 빵도 두 봉지밖에 없어서, 오늘 저녁부터 쌀을 먹으면 나중에 식량이 모자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산장에서는 간단히라도 음식을 사 먹기로 했다. 그래서 세론에서는 야채 피자를 한 판 시켰다.
야채 피자는 한 판에 16,000페소나 하는데, 예상과 다르게 꽤 크고 토핑이 푸짐한 피자가 나왔다! 우리는 기껏해야 1인분 정도의 피자일 줄 알았더니 전혀 아니었음. 생각보다 2만 원 값을 하는 피자였다. 그리고 친구가 아까 리셉션 직원한테 15분 동안 얻어 쓴 와이파이가 갑자기 잘 터지기 시작해서 둘이서 그 와이파이로 열심히 놀았다. 여기 와이파이는 1시간에 만 원이 넘는데 우리는 피자를 먹는 동안 알차게 무료 와이파이를 즐길 수 있었다ㅋㅋㅋ
아쉽게도 오후 6시 반에 내부 청소를 해야 한다고 내쫓겨서 무료 와이파이 시간은 끝이 났지만, 예상치도 못한 수확이라 무척 재미있었다. 그 사이 가족한테 간단히 안부도 전하고 가좍한테도 근황을 보냈다.
내일은 오늘과 비슷한 난이도에, 거리만 더 먼 루트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날씨는 변화무쌍한데다 오후가 되면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거세질 확률이 높다고 해서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어차피 인터넷도 안 되고, 캠핑장 근처 풍경은 특출난 게 없어 할 일도 없다. 그래서 일찍 텐트 속에 자리 잡고 누웠는데 바깥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른 가방과 신발을 텐트 안쪽으로 가지고 들어왔는데, 밤에 춥지는 않을지, 내일 걸을 길이 진흙탕이 되지는 않을지 살짝 걱정이다.
3. 비용
- 숙소 - 46.5달러
- 식사 - 맥주 7,000페소, 비건 피자 8,000페소
- 관광 및 투어 - 센트럴행 미니 서틀 3,000페소, 국립공원 입장권 36,400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