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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댕의 게임/여행라이프
[칠레] 9일차 O 트래킹 사흘째, 로스 페로스에서 파소를 넘어 그레이까지 15km의 가장 힘든 구간을 넘다 본문

1. 일정
- 오전 4시 반-6시) 아침 식사
- 오전 6시-9시) 로스 페로스에서 출발해 존 가드너 전망대 도착
- 오전 9시 반-11시 15분) 파소 도착
- 오후 12시-3시 반) 그레이 도착
- 오후 5시-6시) 저녁 식사
2. 사진과 감상

두꺼운 침낭에 경량 침낭을 껴 입고 잤더니 춥진 않았다. 다만 매트가 아무래도 불편했는지 중간에 두 번 정도 깼는데 이제는 깼다가 다시 자는 게 익숙해져서 괜찮다. 오전 4시 반, 친구의 알람 소리에 함께 깼다. 오늘은 O 트래킹 중 가장 극악무도한 루트를 가야 해서 6시쯤엔 출발하기로 했기 때문. 산장에서도 체크인 시 다음날 체크아웃은 오전 7시 이전이라는 걸 몇 번이고 강조하는데, 늦게 출발했다가 다음 산장에 제때 못 도착하면 위험하다고.
어제 일찍 자서 잠이 모자라단 느낌은 없어 전보다 쉽게 일어날 수 있었다. 바깥은 일찍 일어난 사람들이 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리던데, 함께 길을 떠날 사람이 꽤 있다는 게 제법 위안이 되었다. 게다가 빗소리도 딱히 안 들리는 것 같고. 아침거리를 들고 밖으로 나서니 맑은 하늘이 보였다. 먼 길을 걸어야 하는데 날씨라도 좋으니 낫다.

오늘의 아침은 양송이 스프에, 식빵 세 장이다. 왜 어제보다 늘어났냐면 오늘은 힘든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늘 우리를 도와주던 외국인이 안 보이길래 다른 친구에게서 성냥을 빌려 불을 붙였다. 사실 산장에서 라이터 하나만 사면 되는 일이지만 최대한 도움을 받아 연명하기로 했다.
식빵은 질릴 법도 한데 한국에서 자주 안 먹던 음식이다보니 견딜 만하다. 양송이 스프는 평범한 맛이었지만 따뜻해서 아침으로는 제격이었다. 아침을 먹고 있으니 잠에서 깬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금방 북적북적해졌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친구가 수세미와 설거지 비누도 전 산장에 놓고 온 걸 깨달았다. 아침에 빠르게 떠나느라 까먹은 듯... 다행히 산장 주방에 수세미와 세제가 있어 설거지를 할 수는 있었다.

정리를 다 하고 텐트로 돌아와 짐을 챙겨 그레이를 향해 떠났다. 총 이동 거리는 15km인데 평균 10시간 정도, 느리면 12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라니 어떻게 생겼을지 감도 안 온다. 출발하기 전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12시간을 더해보니 그레이 산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오후 6시였다. 지금껏 산장에 늦어봤자 오후 2-3시쯤엔 도착했는데 저녁 시간이라니, 그때까지 산장의 밥이 남아있기를 바라며 출발했다.



로스 페로스 캠핑장에서 길을 나선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엄청난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초장부터 엄청난 난이도인데 싶었다. 오르막길 다음으로는 온통 진흙밭이 나타났는데, 여기저기 나뭇가지나 돌 등을 밟고 지나가야 했다. 거의 곡예 수준으로 진흙을 이리저리 피해가는데 힘든 건 둘째치고 길이 지루하지 않아 나름 재미있었다. 출발 드림팀을 체험하는 느낌이었음.
이런 길이 계속되다 보니 앞서 출발한 다른 외국인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우리가 성큼성큼 지나가면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사람들이 계속 비켜줘서, 어느 순간 외국인 무리를 제치고 앞서 나가게 되더라. 절대적인 거리는 길지 않은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가 이런 길들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길들.

길게 이어진 숲길이 끝나고 탁 트인 곳으로 나가기 직전에 우리가 어디쯤 왔는지 쓰여 있는 팻말을 발견했다. 거리로는 대충 중간 지점인 파소까지 3분의2 정도 온 것 같은데, 어떤 심술궂은 사람들이 거리가 새겨진 부분을 파놓아서 정확히 몇 키로가 남은지는 알 수 없었다.



답답한 숲길을 벗어나 돌 언덕에 오르니 주변의 미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이어지는 길 양쪽에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산군과 저 멀리 아마도 우리가 넘어야 할 높은 산들이 보였다. 그 웅장함이 돌로미티와 비슷하거나 더해서 한참 동안 멈춰 풍경 사진을 찍었다.


정신을 차리고 짧은 숲길로 내려갔다가 다시 돌산으로 나오니 엄청난 경사의 돌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만따이 호수 트래킹보다는 낫다며 열심히 걸어 올라갔다. 우만따이는 진짜 5보에 한 번씩 쉬고 난리였는데 여기는 적어도 열 보는 쉬지 않고 올라갈 수 있었음. 그래도 힘들긴 힘들어서 끙끙대며 올라가는데, 뒤에서 요상한 억양으로 안녕히하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다. 나는 다른 외국인인 줄 알았더니 제임스가 바짝 쫓아온 거였다!



돌산을 하나 넘고 나서 뿌듯함에 쉬고 있는데, 바로 앞에 다음 언덕이 보였다. 본격적으로 길이 험난해지고 있었다. 언덕을 넘어 또 다른 언덕이라니.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데 뒤따라온 인싸 오브 인싸 가브리엘은 마주친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 중이다. 두 번째 언덕을 겨우 넘고 나니 이제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이 끝나면 또 오르막길이고. 여기서 O 트래킹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두텁게 쌓인 눈을 봤다!



조그마한 얼음을 지나 올라가니 까마득히 멀고 가파른 언덕을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가는 게 보였다. 작은 언덕을 넘고 나니 길고 가파른 언덕이 나타난 것... 한숨이 나왔지만 꾸역꾸역 걸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 풍경은 또 어디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하게 너무 멋있어서 감탄만 나온다.


언덕이 거의 끝나가서 힘을 내려는데 저 멀리 산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저렇게 가파르고 긴 산을, 심지어 잘 닦인 트래킹 길도 아닌 자잘한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리는 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니. 하지만 나도 쉬지 않고 걷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열심히 올라가는데 옆에는 아까보다 큰 눈도 보인다. 그리고 경사도 면에서 하이라이트인 길이 나왔다. 여기는 거의 우만따이 급으로 힘들었다. 너무 가팔라서 조금만 올라가면 앞서 오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였다. 하지만 떨어질까 무섭지는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음.



언덕을 다 올라가니 양 옆의 산군이 훨씬 더 멋있게 보이는 건 좋았다. 오른쪽에는 하얀 설산이, 왼쪽에는 자잘하게 갈라진 파란색 산군이 있는데 올라가다 힘들면 멈춰서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두리번거리면 좀 낫더라.


그렇게 열심히 올라갔는데, 거짓말같이 새로운 오르막이 나타났다. 저 멀리 오르막 위에서 가브리엘과 제임스가 쉬고 있는 모습도 보였는데, 나는 오르막을 본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아 미처 반가울 틈도 없었다. 이제는 확실히 고도가 높아졌는지 얼음도 길 중간중간 더 자주 등장한다. 다행히 바람이 강하거나 날씨가 춥거나 하진 않았는데, 날이 안 좋을 때 이 길을 걸을 걸 생각하니 아찔하다.

초반에 잠깐 숲이 나온 것 빼고는 여태껏 돌산만 걸어왔으니, 오늘의 테마는 돌임이 틀림없다. 길 중간중간 돌에 주황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는데, 가끔 이 길이 맞나 싶은 부분에 돌이 놓여 있어 참 힘들었다. 정말 바닥만 보면서 열심히 기어갔음.



그렇게 산을 올라 이제 겨우 평지가 나오나 싶더니 평지 조금에 저 멀리 또 다른 산이 하나 있는 걸 보고 주저앉을 뻔했다. 그 와중에 주변 풍경은 또 미쳐서... 계속 멈춰 풍경 사진 찍느라 더 힘들었다. 하지만 모든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 감내할 수밖에.



중간에 눈으로 덮인 길도 걸어갔다. 덕분에 숲길을 지나느라 진흙투성이가 되었던 내 신발도 새 신발처럼 깔끔해졌다. 눈 위를 걷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는데, 아이젠이 없으니 잘 미끄러지고 가끔가다 발이 깊게 빠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 눈 위를 걷는 구간이 짧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앞에서 가브리엘과 제임스가 기다려서 더 열심히 올라가야 했음... 하... 기다려주지 말라고... 난 적당히 쉬면서 가고 싶다고...


마지막 언덕에 가까워지자 앞서 가던 친구가 여기 풍경이 엄청 멋있다며 소리를 질렀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힘겨운 한 발짝을 떼어 올라갔더니... 눈앞에 엄청난 규모의 빙하가 펼쳐졌다. 산군을 따라 빼곡히 들어선 그레이 빙하였다. 아마 이곳이 빙하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존 가드너 뷰포인트인 듯함.
모레노 빙하를 측면에서 보는 느낌인데, 빙하의 시작점부터 밀려 내려온 모습까지 한번에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산에 끼여 내려온 빙하들도 여럿 보여 신기했다. 지금까지 고생하며 올라온 게 한번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모레노 빙하를 먼저 보고 와서 그레이 빙하는 큰 기대가 없었는데, 그 생각은 큰 오산이었음.

멋진 뷰포인트에 도달한 기념으로 쉬면서 간식을 좀 보충하기로 했다. 장애물 하나 없는 꼭대기라 바람이 강해 가브리엘과 제임스가 선점한 바위굴에 같이 낑겼다. 각자 가져온 간식을 먹으며 여러 이야기도 나눴는데, 가브리엘이 게임을 좋아한다길래 페이커와 T1을 언급했더니 찐 겜덕 바이브가 나와서 내가 더 놀랐다ㅋㅋㅋ 그리고 우리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간다니 그곳의 공동묘지가 정말 좋았다며 추천해줌.
그리고 우리도 먹을 거 꺼내서 열심히 먹고 있는데 제임스가 스니커즈 두 개를 나눠줬다. 트래킹을 하면 이런 초코바류 간식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되는데, 무려 스니커즈를 준 것에 엄청 감동했다. 우리도 딸기 초콜릿으로 보답함ㅎㅎ 그러고 나서도 한참 대화했는데 영어가 좀 딸려도 친구들이 착하고 유쾌해서 간만에 재밌게 대화했다.



제임스와 가브리엘은 조금 더 쉬다 간다길래 먼저 일어나서 출발했다. 그레이 빙하에 가까워질수록 이 풍경이야말로 O 트래킹의 정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규모나 웅장함이나 무엇이든 하나 빼놓을 것 없이 좋았다. 아마 모레노 빙하의 끝자락도 저렇게 생겼겠지. 위험하겠지만 언젠가 저런 곳도 탐험하고 싶어진다.



O 트래킹 루트 중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왔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오른쪽에 위치한 빙하를 감상하면서 돌길을 따라 쭉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초록빛 숲이 무성해지던데 하얗고 파란 빙하 옆에 진한 초록빛 나무들이 있으니 신기했다.



그리고 지옥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무릎이 아플 정도로 높은 계단이 계속되더니 이제는 계단이 아닌 미끄러운 내리막길도 섞여 나온다. 처음에는 폴대로 짚으면서 최대한 조심조심 내려갔지만, 나중에 가서 힘이 빠지니 무릎으로 온 힘을 다 받아내며 내려가야 해서 힘들었다. 분명 오르막길 오를 때 무척 힘들었는데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더 힘들었다.

중간에 외국인 친구들이 파소까지 금방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표지판을 보고 나서 실망했다. 중간 지점까지 아직도 한참 남은 건 딱히 보고싶지 않았다. 심지어 누가 또 파소까지 남은 거리를 뭉게놔서 정확한 거리도 모른다. 모르면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



중간중간 나무들 사이로 빙하가 보이면 좀 나은데, 나무들이 빽빽해지고 숲 안쪽으로 들어가 진흙과 나무 그루터기들만 보이게 되면 좀 지루하다. 가끔 시원하게 뚫린 계곡에서 옆에 있는 빙하를 구경할 수 있는데, 그것도 잠시뿐. 이 길이 언제 끝날진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있을 전망대에서 다시 빙하를 보게 될 순간을 계속 기다리며 걸었다.



드디어 파소 도착! 여기까지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남은 거리는 어떻게 이동할지 막막했다. 그래도 파소에 화장실도 있고 물 받는 곳도 있어서 쉬어가는 지점으로는 딱 좋았다. 파리가 많아서 문제일 뿐이지. 쉬면서 아까 제임스에게서 받은 스니커즈를 꺼내 먹는데 제임스와 가브리엘이 뒤늦게 도착했다. 그래서 또 앉아서 10분 정도 이것저것 얘기함. 가브리엘이 자기 꿈의 집을 설명하면서 우리에게도 꿈의 집이 있냐고 묻던데 정말 대화 주제가 쉴 새 없이 나와서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둘이 어떻게 만난 건지 물었더니 대학 친구라고 함.



파소에서 나오면 가까이에 빙하가 잘 보이는 언덕도 있다. 언덕에 올라 풍경을 둘러보자마자 여기서 쉴 걸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장관이었다. 바람도 세게 불지 않고, 파리도 없음. 너무 아쉬웠지만 스니커즈는 이미 다 먹었기 때문에 사진만 후딱 찍고 내려왔다. 오늘 빙하는 정말 질리도록 보는 듯.


그리고 죽은 것처럼 보이는 백목이 엄청나게 많은 언덕을 지나... 끊임없이 오르막을 오르고 또 올랐다. 오르면서 오른쪽에는 탁 트인 빙하와 호수 풍경이 보였는데, 힘들어서 고개를 자주 돌릴 수 없어 아쉬웠다. 천천히 걸으면서 풍경을 감상하고 싶은데 또 너무 천천히 가면 제시간에 그레이 산장에 도착할 수 없을테니 딜레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또 확인할 수 있었는데, 확실히 그레이 빙하를 한눈에 본 지점이 정상이었는지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더라. 그리고 표지판 뒤에 진짜가 숨어 있었으니... 모 블로그에서 봤던 O 트래킹 하늘다리다. 보자마자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길고 위태로운 다리라 두 발짝 걸을 때마다 심호흡을 해야 했다. 발을 정확히 판자에 디딜려면 아래를 내려다봐야 했는데 그게 또 무서웠다. 또 폴대는 한손에 잡고 가야 했음...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친구는 이를 악물면서 건넜다.

다리를 건넌 다음의 풍경이 절경이라 무서움은 금방 가셨다. 다리 뒤쪽의 절벽과 산이 정말 멋있어서 피츠로이의 아쉬움이 싹 내려가는 느낌. 하늘다리는 한번에 4명까지 건널 수 있던데, 친구 말로는 여럿이서 건너면 다리가 예측하기 힘들게 흔들려서 더 무섭다고. 하지만 겁 없는 가브리엘은 다리 한가운데서 사진까지 찍더라.


다리를 건너고 나니 어느새 그레이 빙하의 끝자락이 가까이 보인다. 저 멀리서 내려다 봤을 땐 까마득히 멀어 보이더니, 이제는 너무 가까이 보여서 신기했다. 그러다가 빙하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내리는 것도 봤다. 정확히는 가브리엘만 봤고, 나는 걷다가 빙하가 갈라져 호수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빙하가 떨어진 지점에 큰 파동이 일어서 어느 부분이 깨졌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모레노 빙하에서는 작은 빙하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것만 봤는데, 그레이 빙하에서 큰 조각이 깨지는 것도 듣게 되니 빙하는 이제 볼 건 다 본 것 같다.



가파른 오르막이 있으면 오르막을 오른 후에 합당한 풍경이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걸 깨달은 직후라 정말 힘든 오르막이었음에도 꾹 참고 열심히 올랐다. 하지만 정말 힘들긴 했음. 내 다리를 찢어가면서 겨우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서 본 빙하 호수의 빛깔과 그레이 빙하의 모습에 힘든 것도 싹 잊었다.



그리고 또 한참 오르막길을 걷고 걸어서 그레이까지 4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표지판 옆의 언덕을 열심히 오르니 앞서 간 제임스와 가브리엘이 앉아서 쉬고 있다가 우리에게 전망대도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너무 힘들었지만 다들 짐 두고 올라간다니 금방 솔깃해짐. 배낭을 두고 걸으니 좀 살 것 같았다. 너무 더워서 안에 히트텍만 입은 채로 바람막이를 걸치니 더 살 것 같았음. 늦게 도착한 캐나다 친구 그레햄도 합류하더니 무척 더웠는지 웃통 벗고 열심히 올라가더라.


5분 정도 걸려 전망대에 올라가니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전망대 뷰는 글쎄... 우리가 걸어오며 본 빙하 풍경이 훨씬 멋있었다. O 트래킹을 하지 않고 W 트래킹만 하는 사람들은 파소 존 가드너까지 가지 않고 이 빙하 전망대만 들렀다 돌아가는 경우도 많은 듯. 그래도 빙하 뷰를 보며 쉬어가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전망대에서 내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하늘다리를 맞닥뜨림. 이번에는 친절히 한번에 4명이 최대라고 쓰인 팻말도 있다. 길이는 첫 번째와 다를 바 없이 길고 험난했다. 그런데 내가 건너는 중간에 사람들이 저 페리 좀 보라고 외치는 게 들렸다. 오른쪽을 보니 빨간 페리가 빙하 호수를 달리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무서워서 사진 어떻게 찍히는지도 모르는데 일단 여러장 찍고 봄.
건너가니 반대편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외국인이 대단하다면서, 아까 자기가 본 어떤 커플은 여자는 잘만 건너가는데 남자가 울면서 건너더라는 얘기를 해줘서 한바탕 웃었다ㅋㅋㅋ 그나저나 다 건너고 나서 보니 다리 정말 무시무시하다.


다리를 건너고 또 길고도 지루한 숲길을 열심히 걸었다. 풍경이 잘 바뀌지 않는 숲을 걷다 보니 하늘다리를 건너는 게 더 재밌겠단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세 번째 하늘다리가 나타났다. 머리 위 하늘다리를 보지 못하고 신나게 걷던 친구는 마지막 다리가 바로 앞에 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마지막 다리는 내려가는 길도 험난했다. 구급대원 훈련 영상에서 본 것 같은 사다리를 양쪽 줄만 잡고 내려가야 해서 나도 식은땀 흘렸다... 그리고 또다시 우리가 얼만큼 왔는지 알게 될 시간이 왔다. 표지판을 보자마자 그래도 꽤 왔구나 싶어 뿌듯했다. 몇 키로 남았는지는 또 오리무중이지만 이 정도면 가파른 내리막도 얼마 안 남았을 듯!



중간에 또 탁 트인 전망 좋은 언덕이 있어 올라갔는데, 그레이 빙하 끄트머리에서도 멀게만 보이던 빙하 조각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 근처에서 카약킹을 하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는데 빙하 호수에서 카약킹이라, 낭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는 정말 다리에 힘이 빠져서 폴대에 의존해 터덜터덜 걸었다. 무지막지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오느라 양쪽 새끼발가락이 얼얼해서 아주 약간의 완만한 내리막조차도 힘든 지경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평지길이 계속되어서 살 것 같았음.

중간에 지나치는 사람들한테 캠핑장이 얼마나 남았냐고 물었는데 다들 금방이라고 해줘서 더 버틸만했다. 금방은 아니었지만 금방이라고 하면 더 견딜만하니 다들 그렇게 말해준 거겠지? 그 마음이 참 고맙다...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캠핑장에 무사히 도착했으니까. 중간에 빅풋 컴퍼니 야영장으로 잘못 새긴 했지만.

드디어 그레이 캠핑장에 도착! 오전 6시에 출발해서 오후 3시 반쯤 도착했으니 총 9시간 반쯤 걸린 셈이다. 10시간보다 적게 걸려서 너무 뿌듯했다. 뿌듯한 것과 별개로 다리는 이제 감각이 없더라.
그런데 체크인을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다가올수록 누가 봐도 피츠로이에서 함께한 H였는데,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사람을 착각했나 싶었다. 알고 보니 파이네 그란데에서 그레이 산장까지 걸어왔고, 빙하 전망대에 갔다가 파이네 그란데까지 다시 돌아가야 해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웠던 거였다. 심지어 혼자 텐트와 캠핑 용품을 다 짊어지고 다녀서 너무 힘들다고... 그래도 일정이 엇갈려서 토레스 델 파이네 트래킹 중에 못 볼 줄 알았는데 만나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 지친 상태였지만 셋이 셀카도 찍고 헤어짐.


버티스 회사 산장이 전부 우리의 예약을 누락했길래 오늘 체크인도 녹록치 않으리란 걸 예상했지만 힘든 여정을 마치고 온 상태라 기다리는 게 평소보다 더 힘들었다. 그래도 무사히 예약을 확인받고 우리의 텐트로 안내받음. 그레이 산장부터는 W 트래킹과 O 트래킹 루트가 겹쳐서 사람이 많더라. 텐트도 훨씬 수가 많았다. 텐트는 빈 것들 중 우리가 원하는 걸 고를 수 있게 해주길래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정했다.
그리고 바로 샤워실로 직행. 로스 페로스 산장은 찬물 샤워만 된다길래 참고 그레이로 온 거라 핫샤워가 너무 기대됐다. 그런데 샤워실에 들어서자마자 샤워룸이 네 개나 있고, 꽤 깔끔하다는 것에 첫 번째로 감탄. 샤워기를 틀었는데 찬물이 5초 정도 나오고 바로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 것에 두 번째로 감탄. 물에서 나오고 싶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랜만에 정말 개운하게 씻은 듯하다.


씻고 나서 할 일은 산장 밥을 사서 맥주랑 함께 먹기. 그레이 산장 미니마켓은 그동안 들렀던 캠핑장 미니마켓과 차원이 다르다. 파타고니아 맥주도 종류별로 다 있고 심지어 계란도 있음! 바로 파타고니아 삼봉 맥주를 하나씩 사서 식당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식당엔 풀보드 이용자들을 위한 예약석이 차 있어 앉아서 먹을 수 없어 햄버거만 받아 나와야 했다. 심지어 메뉴판에 적힌 메뉴 중 클래식 버거만 가능해서 친구도 강제로 고기 먹게 됨.
버거를 받아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맥주병을 따러 들어간 미니마켓에서 가브리엘을 만나 같이 앉게 되었다. 정확히는 밥을 먹는 우리 사이에 가브리엘이 낀 거긴 한데, 가만히 놔둬도 이것저것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하고 불편하지 않아서 괜찮았다. 가브리엘은 어제부터 여행을 다니며 만난 친구들의 편지를 모으기로 했다며, 우리에게도 본인의 수첩을 내밀었다. 그래서 '친절한 가브리엘'이라고 한글로 써주니 엄청 좋아하더라. 중간에 어딘가로 향하던 그레햄도 가브리엘한테 잡혀 얼결에 같이 앉게 되었는데, 우리처럼 메시지를 요구받으니 엄청 정성들여 써 주는 게 웃겼다. 얼굴 표정에 큰 변화가 없어 늘 진지한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반응을 잘 해주는 착한 친구였음.



밥은 다 먹었는데 배가 영 안 불러서 미니 마켓에서 간식거리를 살 겸 옆에 있던 컵라면도 하나 샀다. 마켓에 마침 뜨거운 물도 있길래 텐트에서 빠르게 젓가락을 가져와 컵라면 하나 뚝딱함. 오늘 걸음수를 세어 보니 피츠로이보다도 적게 걸었던데 확실히 힘들긴 했나 봄. 음식이 끝도 없이 들어간다.
그러고 나서 나는 더 이상 깨어있을 기력이 없어 와이파이 세 시간을 사겠다는 친구를 두고 텐트로 들어왔다. 텐트로 들어와서 입구를 닫고 침낭에 들어가니 천국이 따로 없다. 사실 내일 바로 파이네 그란데 산장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긴 해서 그레이 산장 이틀 숙박이 좀 아쉽긴 한데, 내일 아침 다리 근육통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있다.
3. 비용
- 숙소 - 35달러
- 식사 - 맥주 6,000페소, 햄버거 13,000페소, 컵라면과 과자 4,000페소
- 관광 및 투어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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